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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8. 8世 〉2. <요재공>사헌부지평공휘부묘표(司憲府持平公諱溥墓表)
1. 문헌 목록 〉8. 8世 〉4. <부정공>선약장군충무위부사직공묘갈명(宣略將軍忠武衛副司直公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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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정공>통훈대부인천군수공선교랑공양세휘목휘선종(通訓大夫公宣敎郎公兩世事實小識)
通訓大夫仁川郡守公宣敎郎公兩世事實小識 大矣哉古昔聖王之立人統正家法繼絶世明昭穆承承綿綿於無疆其來天地經古今義也若吾家先伯祖通訓大夫仁川郡守諱穆其嗣宣敎郎諱善種即我井邑縣監相好亭府君嫡子嫡孫也以其承世仕宦忠孝供職所謂保宗廟奉祭祀之大夫士而宜享百世道學節義文武德業之卓卓樹立也郡守公一男七女宣敎公無男二女宣敎公當立后系宗以奉父祖之廟祀以啓子孫之世祿奈之何但屬父子後事於季女田廬林瀆之收全入於女家永絶世無傳寂寂寥寥致此家中後輩不記當日事不啻若行路乎嗚呼歷年今將四百而兩世斧堂上下雙封於蓼谷山中尚奉歲一祭蓼谷是女家後孫世居也其誠孝永世不替固爲可尚然窃想象吾先伯祖父子爵祿富榮則見沒及已至於墓貌亦爲荒凉一片短石誌碣無藏樵牧雖禁過無式躬悠悠痛恨蓼溪咽長尚忍言哉若至父無子祖無孫則人無道家無傳矣所以聖法之繼絶承世爲常經通義也顧此不肖自少稍有知識每念此事奉質于家中長走宗内好古宿德則或以爲當時 國制妻妾俱無子女乃可立系故爾其然不其然然則域中士大夫亦有如吾幾家乎凡我井邑公三字次司直諱和即吾十二世祖考也季諱稹一云黙子諱善弼移居松京仍爲松都派也但吾中季兩派今爲百户餘如令伯派有後則其麗不可量此爲至恨其嘉言善行生卒年月筮仕履歷無徵於文獻亦可恨也但昇平續脩誌趙穆 成宗朝行仁川郡守家譜云仁川郡守墓蓼谷村後庚坐配淑人○金氏雙塋父上將軍孫七婿具載世譜宣敎郎墓考塋下同原配宜人光山李氏父縣監點雙塋二婿長尹大有季鄭司直思翊籍慶州號圃堂金甑山從遊昇平四賢之一也三子惇參奉縣監恂直長後世亦昌抑先伯祖餘蔭之黙佑歟噫此事實爲吾家不振之兆朕也窃願吾家今日爲父祖者特以此爲鑑戒苟或無嗣則自近及遠求嗣爲後俾永厥世也顧念人家執能有禪其血受其氣於世世者乎雖名門世族子人子者多此可爲立人統正家法之一大義也矣 後孫洪根謹撰 통훈대부인천군수공선교랑공양세사실소지(通訓大夫仁川郡守公宣敎郎公兩世事實小識) 위대하도다! 옛적 성왕(聖王)이 사람의 계통을 세우고 법을 바로 하여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소목(昭穆)을 밝히게 하면서 끊임이 없도록 면면히 이어가게 하여 천지가 생긴 이후로 고금의 벼리가 되게 하니, 이것은 하나의 의리인 것이다. 우리 집 선백조(先伯祖) 통훈대부 인천군수 휘 목(穆)과 그 아들 선교랑 휘 선종(善種)은 곧 우리 정읍현감 상호정부군의 적자 적손이시다. 대를 이어 벼슬하고 충효로 직책을 삼아 사당을 보수하고 제사를 받들어 사대부로서 마땅히 백세토록 도학절의 문무덕업(道學節義文武德業)을 높이 수립해야 할 것이다. 군수공은 一남七녀요, 선교공은 무남 二녀니 선교공이 마땅히 후사를 세워 종통을 잇고 부조의 제사를 받들며 자손 대대의 복록을 계발했어야 할 텐데 어찌하여 다만 부자 후사만 계녀(季女)에게 맡겨 가산은 전부 딸집으로 넘어가게 해버리고 길이 대를 끊어 전함이 없어 이와 같이 적막하게 하였으니 집안의 후배로 이 일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길 가는 사람 같을 뿐이 아니겠는가? 아! 이제 연대가 四백 년을 지냈는데 양세 분묘를 요곡산중(蓼谷山中)에 상하로 쌍 봉하고 제를 받드니 요곡은 딸집의 후손이 세거(世居)한 곳이니, 그 정성어린 효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귀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선백조 부자의 관작과 녹봉이며 부귀와 영화를 상상해 보면 감창할 따름이고 묘의 모양 또한 황량(荒凉)하여 한 조각 짧은 돌의 지갈(誌碣)이 없고, 초목(樵牧)은 비록 금하나 지나면서 몸을 구부리는 자가 없으니 멀고먼 슬픈 한은 요곡 시내 소리와 같이 길이 오열하겠으니,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만일 아버지가 아들이 없고 할아버지가 손자가 없다면 사람의 도가 없고 집이 전함이 없을 것이므로 성인(聖人)이 예(禮)를 전할 때에 끊어짐을 있게 하고 대를 전하게 하는 것은 떳떳한 벼리요 통한 의리라 하겠다. 돌아보면 이 불초가 약간 사리를 알면서부터 이 일을 생각하고 집안 어른과 종중장덕(宗中長德)에게 물은즉 「당시 나라의 예법에 처첩에 다 자녀가 없어야 양자를 한다 하였으니 그 그런가? 그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향중의 사대부가 우리 집 같은 집이 몇 집이나 있겠는가. 무릇 우리 정읍공(井邑公)의 차남 사직(司直) 화(和)는 우리 十二세 조고요, 三남 휘 진(稹)의 아들 선필(善弼)이 송경(松京)에 이거하여 송도파(松都派)가 되어 다만 우리 중계 양파가 이제 백호 남짓 되었다. 만일 백파가 후손이 있었으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므로 이것 또한 지극한 여한이며 그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며 생졸년월과 처음 벼슬한 이력을 증거할 문헌이 없는 것이 한스럽도다. 다만 속간(續刊)한 승평지(昇平誌)에 조목(趙穆)은 성종(成宗)때에 인천군수를 지냈다 하였고 가보에 인천군수 묘소는 요곡촌(蓼谷村) 후경좌(後庚坐)로 배(配) 숙인 김씨와 쌍분이고 부는 상장군(上將軍) 윤손(閏孫)이요, 七서(婿)는 가보에 기재되어 있다. 선교랑(宣敎郎)의 묘소는 며(墓)아래 같은 언덕이고 배는 의인 광산이씨로 묘소는 쌍영이며, 부는 현감(縣監) 점(點)이요 二서(婿)는 윤대유(尹大有) 사직경주(司直慶州) 정사익(鄭思翊)인데 호는 포당(圃堂)이요, 김증산(金甑山)을 종유(從遊)하여 승평(昇平) 땅 四현중 一인이었다. 사익(思翊)의 아들 돈(惇)은 참봉이요 빈()은 현감이며, 순(恂)은 직장이고 후손이 또한 창성하니 이것이 선백조의 남음 음덕이 묵묵히 도와주는 때문인가. 아! 이 사실은 우리 가문이 진흥하지 못할 징조이니 간절히 원하건대 우리 집에 부 조(父祖)된 자는 이를 귀감으로 삼아 혹 후사가 없으면 원족간에 후사를 구하여 길이 그 대를 잇도록 할지어다. 돌아보건대 집안에 누가 그 피로 자리를 전하고 그 기운을 받아 대대로 전하게 하겠는가마는 비록 명문세족이라도 남의 아들을 양자로 한 자가 많으니,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계통을 세우고 가법(家法)을 바르게 하는 대의가 되는 것이다. 후손(後孫) 홍근(洪根)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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